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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BLOG, SNS

'좋아요'와 'RT'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얼마 전 J일보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습니다. ‘좋아요가 싫어요’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티핑 포인트>의 저자 맬컴 글래드웰의 글을 인용했는데요.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익명성에 기대는 SNS의 한계


 

‘혁명은 왜 리트윗되지 않을까’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21세기의 이른바 트위터 혁명을 1960년대 흑인민권운동과 대비시킨다. 필자는 후자가 강력한 연대에 바탕을 뒀던 반면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느슨한 연대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익명의 선의를 집결하는 활동이라면 몰라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사회적 혁명은 SNS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흔히 ‘아랍의 봄’ 같은 혁명에 SNS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과 상반된 시각이다.

 

SNS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정보의 유통 속도와 확산 방식을 몰라보게 바꿔놓은 건 분명하다. 대선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그랬다. 안철수 후보가 사퇴를 발표한 직후 문재인 후보의 반응은 그의 트위터에서 가장 먼저 확인됐다.

하지만 SNS의 짧은 글이 수시로 촉발하는 논란의 양상은 이번에도 씁쓸했다. 안철수 후보 사퇴 직후 한 연예인은 트위터에 ‘종북’이라는 단어를 섞은 반응을 올렸다 도마에 올랐다. 두둔할 생각도, 나무랄 생각도 없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여느 사람들처럼 TV에서 보여준 연예활동이 전부다. 그런데도 집중포화 같은 반응이 빚어지는 건 역시나 놀라운 현상이다. 트친이나 페친이 아니라 실제 친구 사이, 친구가 아니라도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는 자리였다면 같은 경우라도 다른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으리라고 본다.  

 

 

이 글을 읽고 그 동안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만드는 모 대기업의 신차 출시 소식에 페이스북에서는 칭찬 일색의 댓글이, 포털 사이트 기사에는 숱한 욕설이 적히는 아이러니(똑 같은 내용의 기사였음에도)를 보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고 할까요?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한에서만 비판을 하고, 감시를 하고, 옳은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트위터나 포털 사이트 익명 댓글이 그런 경우지요. 반면 페이스북과 같이 실명이 드러나는 공간에서는 ‘자신이 어떤 성향인가를 단정지을 수 있는’ 발언은 하지 않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마이 스타일로 꾸준히 ‘옳은 소리’를 하는 사람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나는 모나지 않은 사람이야’ ‘좋은 게 좋은거지’라는 식으로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 일반적입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만일 본인이 ‘경제민주화’쪽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입사를 앞둔 혹은 이직을 앞둔 사람이라면 회사 측에 반하는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것도 대기업 취업을 앞둔 사람이라면 더하지요.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실제로 입사가 결정되었다가 SNS상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입사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는 보통 ‘어디어디 놀러갔다’든지 ‘어떤 맛난 음식을 먹었다' 하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많이 올라옵니다. 정치성을 띤 글이 다수를 이루는 트위터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문제는 페이스북처럼 일상적인 이야기만 나올 경우 이를 토대로 한 특정사항에 대한 ‘결집’이 힘들고, 트위터처럼 익명성에 기댈 경우 정보 출처의 불분명이나 개개인의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어 역시 ‘결집’이 힘듭니다. 개인 신상이 드러날 경우는 성향을 표현하지 않고, 성향을 표현할 경우는 익명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것을 근거로 사회변화를 일으키기는 힘들다는 말이죠. (기존 언론에 숱하게 까이는 SNS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으로 벗어던지는 마음의 부담


 

글은 아래와 같이 계속됩니다.

 

얼마 전 아는 이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가 이내 후회했다. 아주 소중한 그 무엇을 잃고 지금까지 지내온 시간을 담담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뭐라도 공감을 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행동에 옮긴 일이라고는 습관처럼 글 하단의 ‘좋아요’를 누른 것뿐이다. 그때의 심경은 결코 좋지 않았다. ‘나도 슬퍼요’ ‘마음이 아파요’라고 댓글까지 적기가 무안했고, 다시 ‘좋아요 취소’를 누르기도 민망했을 따름이다.

  

SNS의 발전은 인스턴트식 생활방식을 더욱 가속화시킨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봤을 때 공감되거나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글이나 기사는 ‘좋아요’를 누르고 ‘RT’를 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사회참여가 늘었다는 말도 있지만, 문제는 이렇게 ‘좋아요’를 누르거나 ‘RT’를 하는 식으로는 세상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웹상에서 회자되는 선에서 끝날 뿐이죠.

 

 

 

 


다만 이런 SNS식 참여는 참여자의 기분만 홀가분하게 해 줄 뿐인 것 같습니다. 어떤 글이나 주장이 맞다고 생각했을 때 ‘좋아요(혹은 RT)’를 누르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했어’라는 식이죠. 직접 거리로 나가 연대를 하는 건 귀찮고, 그저 클릭 한 번으로 마음의 부담, 부채의식을 벗어 던졌다고 믿는 식입니다. 

 

 

손가락 클릭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제가 SNS의 한계를 실감한 것은 지난 총선 때부터입니다. 트위터 상에서는 마치 세상을 바꿀 것처럼 너도 나도 투표를 하겠다는 사람이 넘쳤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투표율은 실망스러울 정도였고 투표 열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습니다. 결국 개방성을 지향하는 SNS라고 하지만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이웃을 맺고 팔로우하는 '좁은 우물'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겁니다.

 

 

 

 

저 스스로가 무슨 대단한 변화를 갈망하거나 극단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사실을 두고도 매스미디어에 보도되는 것과 SNS상에서 회자되는 것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보니 그 이유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이고,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당 기사의 마무리 문장을 옮기며 글을 마칠까 합니다.

 

SNS는 광장에서 확성기를 잡지 않고도, 매스미디어에 등장하지 않고도 의견을 전파하는 길을 넓혔다. 하지만 여전히 광장에서 풀어야 하는 일이, 140자의 단문을 쓰고 올리는 것보다 긴 시간을 들여야 할 일이 더 많은 게 인간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