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피한잔,생각 한모금

금연 정책에 대한 소고

담배적(的) 세계를 생각하며; 금연 정책에 대한 소고



느 순간부터 담배라는 소품은 매우 민감한 기호가 되어버렸습니다. 담배는 이제, 흡연가들에게만 긍정되는(비흡연자들, 반흡연자들에게는 강력히 부정되는) 협착한 애장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담배 연기는 비흡연가들에겐 곤욕일 테지만, 그래도 어느 때인가는 “오죽하면 저러고 피워대겠냐..”, “뭔 일 있냐?”, “그것만 피우고 얼른 들어와.” 하는 식의 구수한 허용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어휴, 이 담배 연기 좀 봐!” 하면서도, 그 담배 연기 속으로 기꺼이 들어와서는 다짜고짜 “무슨 일인데?” 말을 건네보는 다가섬의 관계가 어느 때인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곡히 꽂혀 있었던 겁니다. 간접 흡연은 둘째로 치고, 지금 이 순간 오도카니 궐련을 뻐끔거리는 저 이의 심정을 궁금해 하고,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으니 저러고 있겠거니 하며 가만히 지켜보아주려는 태도가 첫째로 작용했던 인간계였습니다. 간접 흡연 걱정 말고 이 연기 속으로 “드루와, 드루와~” 하는 투로 선동하는 것으로 비칠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그럴 리가요. 인간이니까, 담배도 피우고 그러는 거죠, 인간이니까, 같은 인간의 담배 연기 속에서 그 인간의 속내를 좀 알고픈 마음도 생기고 그러는 거죠, 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금연 정책의 표면적 모티브는 다들 알다시피 ‘국민 건강’입니다. 의학적 개념이죠. 이성적 접근입니다. 그렇죠. 사람의 신체가 망가지면 의술로 고칩니다. 메스가 배를 가르고 푹 꽃히는 일입니다. 감성이 끼어들 자리는 없죠. 감성이 메스를 다루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날선 서슬을 조금이나마 무르게 해주는 건,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하는 의사 선생님들의 말입니다. 그래야죠.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죠. 언제든 내 몸을 해부할 준비가 돼 있는 하얀 의사 선생님들이 ‘스트레스’라는 감성의 영역을 언급할 때면, 안심하고 담배 한 대 피우고픈 기분이 듭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란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받아낸 것들을 배출해야 내 몸뚱어리가 잘 버티고 살아낼 수 있겠다 싶은 겁니다. 구태여 그 배출법이 흡연이어야 할 이유는 없겠으나, 어쩌겠나요, ‘나’라는 개인에게는 담배 한 대 물고 멍하니 서성이는 것만큼 좋은 배출구가 없는데. 


이러나 저러나 비흡연가들 앞에서 흡연가들은 이궁해집니다. 발암 막대기를 물고 있고, 후- 후- 카드뮴 연기를 잘도 내뱉어대니까요. 간접 흡연 피해라는 이슈에 대항하여 흡연가들이 대거리할 논리는 사실상 없습니다. “여기 애들 안 보여요? 왜 아파트 단지에서 담배를 피우고 그래요?”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홀쭉해진 꽁초를 손가락에 끼우고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스트레스 풀러 담배 한 대 물고 나왔다가, 도리어 자책감 하나를 더 얹어서 돌아가는 셈입니다. 편히 연기를 토해낼 곳은 골목 구석이나 심야의 가로등 밑 정도 됩니다. 거기 ‘돗대’마냥 멀거니 서서 한 대 빨아 태우고 터벅터벅 다시 비흡연자들의 세계로 되돌아갑니다.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을 때는, 비흡연자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죠. 비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음에도 흡연자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갈 땐 가더라도 담배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신세계>의 이중구는 자신을 죽이러 온 똘마니들에게 담배 한 대를 꾸고 담담히 칼을 받는다.

죽음의 세계로 밀려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담배적 세계’를 수성하는 보스의 로망이라니.

흡연가들에게 담배란, 때때로 가장 절박한 순간에 ‘나’와 ‘나의 세계’를 다잡으려는 점잖은 몸부림의 수단이다.

그것이 헛과시처럼 보인다면, 아마도 흡연가는 자신이 되고 싶은 캐릭터(지금의 자신과는 다소 동떨어진)에 

몰입한 채 메소드 연기를 시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국민 건강’이라는 말에서 ‘국민’은 달리 말해 ‘우리’입니다. 이 우리가 일반성(generality)이 아닌 보편성(universality)을 획득할 때 흡연가와 비흡연가 모두 그럭저럭 공존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일반성의 반대 개념은 특수성(specificity)입니다. 일반에 속하지 못하면 특수자로 보는, 말하자면 분별의 시각이죠. 보편성의 반대 개념(이라기보다는 종속 개념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은 개별성(individuality)입니다. 즉, 개성입니다. 숱한 ‘나’들이 모여 보편의 우주를 결성한다는, 일반성-특수성에 비해 다소간 열린 시선입니다. 국가 정책의 최종 지향점이 보편에의 추구라면, 정책의 포커스는 우리로서의 국민뿐만 아니라 ‘나’로서의 국민에게도 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국가가 ‘나’라는 주체성을 비호해주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런 제스쳐만이라도 적극적으로 취해준다면 세상의 많고 많은 ‘나’들에 내적으로나마 가까워질 것입니다. 흡연자는 비흡연자의 세계로, 비흡연자는 흡연자의 세계로 한 발 더 다가서는 진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하고요. 정책의 힘이 갖는 건설적 측면일 수도 있겠고요.


양자물리학이라는 분야를 파본 적은 없지만, ‘나로 인해 우주가 생성된다’라는 개념을 가진 학문이라는 건 얼핏 알고 있습니다. 개인이 없다면 우주도 없다는 식으로 확장이 가능하겠죠. 납득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이 세계에 없다면,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까요. 뉴에이지스럽지만, 어쨌든 꽤 ‘감성적’인 과학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 ‘북디자인’의 영역을 최초로 개척한 어느 디자이너는 “담배에는 담배적 세계가 있다.”라는 현인 같은 소회를 남긴 바 있습니다. ‘담배적’의 ‘적(的)’은 본뜻이 과녁입니다. 신비로운 낱말이죠. 자신만의 우주를 가진 개인은,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과녁을 응시하며 살아갑니다. 정중앙을 명중시키는 일이란 지난하지만, 재차 활시위를 당기고 살을 바르고 먹이는 데에서 그만의 즐거움을 얻기도 합니다. 흡연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행위도 제 나름은 활 쏠 준비를 해보는 과정입니다, 라고 한다면 너무 오그라지는 말일까요? 비흡연자가 담배 대신 다른 무언가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것 역시 궁사의 마음가짐과 일맥입니다, 라고 한다면 퍽 거창하려나요? 담배가 됐든 뭐가 됐든 ‘나’라는 이름의 주체들은 저마다의 세계관을 갖고 언제든 거기로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그런 ‘나’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사회도 과학도 의학도, 그리고 담배도 없었겠죠. 여러 세계들이 맞닿아 있다는 전제 하에, 이 ‘나’는 저 ‘나’의 세계를 침략하지 말아야 할 책무를 지닙니다. 완곡히 표현하려다 보니 오히려 어수선해지는 듯한데, 역시나 하고 싶은 말은, 금연 정책이 올바른 실효를 거두려면 ‘흡연 정책’이 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웃기는 소리 같지만, ‘흡연가 & 비흡연가’에서 ‘흡연가 vs. 비흡연가’ 패러다임으로 완벽히 전환되는 데 성공한다면, 수많은 ‘나’들은 오로지 ‘나’로만 남을 것이 뻔한 결과값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각양각색 다종다양했던 저마다의 과녁들도 서서히 소멸해갈 것입니다. ‘vs.’의 관계전(戰)에서 승리한 몇 사람의 과녁들이, 패잔병들의 과녁들을 대체하겠죠. 결국 ‘나’는 ‘우리’에 함몰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보도되는 금연 토픽은 곰곰이 들여다보면 만만하지가 않은 겁니다. 뭐, 모든 일이 다 만만하지가 않기는 하죠. 금연도 어렵고, 흡연도 어려운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