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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한잔,생각 한모금

1억 부 팔린 드래곤볼, 우리나라에선 얼마나 팔렸을까?


1990년대 초반, 서울문화사의 만화주간지 <아이큐 점프>를 통해 선보인 드래곤볼은
컬처쇼크라고 불릴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파격적인 내용, 섬세한 그림, 기발한 소재.
그 모든 것이 이전까지의 우리나라 만화에선 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죠.

얼마 후 대원미디어는 드래곤볼의 인기에 자극을 받아 <소년 챔프> 창간과 함께 슬램덩크를 들여와
맞불 작전을 펼쳤습니다. 이 시기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는 투톱 체제를 이루며 일본만화 붐을 일으켰고,
이후로 다양한 일본만화가 국내에 진출하게 되었답니다.

해적판으로 먼저 선을 보인 일본만화
하지만 모든 일본만화가 정식계약을 맺어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본만화는 불법복제품으로
먼저 선을 보였는데요, 지금 2~30대들은 어린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500원짜리 해적판 만화를 기억하실
겁니다. 수많은 해적판 만화가 제목을 바꿔 달고 국내에 유통되었고, 심지어 드래곤볼의 해적판이었던
‘드라곤의 비밀’을 판매했던 출판사 사장이 큰 돈을 벌어 빌딩을 지었다는 소문도 있었지요.
하지만 국내에서 팔린 불법복제품의 수익이 저자에게 돌아갔을까요?
 

<우리나라 만화시장에 큰 영향을 끼친 드래곤볼. 최근에는 국내업체에 의해 온라인 게임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

만화가들의 주 수입원은 단행본 인세 수입, 즉 저작권 수입입니다. 물론 매달 잡지에 연재해서 버는 원고료도
있지만 이 돈은 작업실 임대료, 재료비, 어시스턴트 비용 등으로 대부분 빠져나가고 실제로 큰 돈을 버는 알짜수입은
단행본을 팔아 얻는 인세수입입니다. 슬램덩크가 한창 인기있던 시절, 작가였던 다케히코 이노우에가
인세 수입으로 일본 종합 소득세 납부 1위를 기록했던 사실은 만화계의 전설로 남아있죠.

<슬램덩크. 저자가 자비를 들여 일본 4대 일간지에 독자 감사 메시지를 낸 일화는 유명하죠.>


사서 보는 문화가 정착된 일본에서는 인기 작가가 아니더라도 일정 판매 부수가 유지되기에 만화를
그려서
‘생활’이 가능하고, 만약 히트를 치게 되면 재벌 부럽지 않은 생활도 가능하답니다. 자신이
그린 작품에 대한
대가가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오는 셈이지요.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만화책을 사서 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1990년 대 후반 생긴 도서대여점 때문에 ‘만화책은 대여점에서 빌려보는 것’이란 인식이 널리 퍼졌고, 그 때문에
작가에게 돌아와야
할 돈이 대여점으로 들어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답니다. 요즘은 그 돈마저 아까워
스캔한 만화책을 다운받아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러니
‘판매부수=전국 대여점 수’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1년에 수십 만부가 팔리던 단행본이 3천 부 이상 판매되는 만화는 찾아보기 드물죠.


저작권이 무시되는 우리나라 만화시장

우리나라 만화 중에서 가장 인기있다는 양재현 작가의 <열혈강호>의 초판 발행 부수가 채 1만 부가 안 된다고
하니, 그 이하는 말할 것도 없지요. 결국 우리나라 만화가들은 애써 만화를 그려도 수입이 없으니 직업을
바꾸거나, 창작만화를 그리는 대신 게임회사에 취직해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하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열혈강호는 우리나라 출판만화 시장의 명맥을 잇는 몇 안되는 작품입니다.>


다시 드래곤볼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만화 사상 최초로 누적판매량 1억 부를 기록한 드래곤볼의 작가는 물론 부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해적판으로 판매된 금액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해적판으로 팔린 드래곤볼의
수익은 작가가 아닌 불법복제를 한 출판사의 몫으로 돌아갔으니까요.


다른 나라 만화이기 때문에 상관없지 않냐구요?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각인된 인식은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산업 전반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대여점에서 빌려보고, 불법 스캔물을 다운 받는 등 저작권에
대한 관대한(?) 인식은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만화 시장을 고사시키는 결과를 낳았죠.

조금 엉뚱하지만, 일본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우리나라와 얼마나 다른지 반증하는 자료가 있습니다.
럭키짱, 대털 등으로 인터넷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로 유명한 김성모 작가는 최근 일본의 <혐한류>에
대항한 만화 <혐일류>를 제작했습니다. 일본에도 번역 출간된 이 만화가 거둔 성적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380부:일본 2만 부. 일본인들에게 거슬릴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만화가 오히려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만화 시장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반증하는 셈이지요.

 

<일본의 혐한류에 대응해 만들어진 김성모의 혐한류>


저작권 무시는 창작의욕의 저하로

만화나 영화, 게임과 같은 콘텐츠 산업 분야에서 저작권 보장은 특히 중요합니다. 창작이 중시되는 콘텐츠 산업
종사자들에게는 저작권이 곧 수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될 때 창작에 전념할
수 있고,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우리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줍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수입은 커녕 생활을 걱정해야 할 어려운 형편이니, 이런 환경에서
양질의
콘텐츠가 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욕심 아닐까요?

문화 강국일수록 무형자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높다고 합니다.
결국
우리나라 문화를 살리는 길은 자기가 누리는 만큼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죠.
저작권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야말로
우리나라 만화는 물론, 문화를 살리는 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