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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상인 하루하루

가을 제주도 3박 4일 여행 후유증

제주도는 재주도 참 좋습니다. 떠나온 지 한참 지났는데, 갈수록 더욱 생생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죠. 혼자 여행할 만한 여행지를 물었더니, 많은 분이 제주도를 추천하더군요. 생생한 경험담을 더해서 말이지요. 항공권을 결제하고 3일 뒤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제주에는 홀로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 많더군요. 제주라는 낯선 섬은 행여 누가 상하게 할까 두려워 내놓지 않았던 꽁꽁 싸맨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놓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바람도 돌도 제멋대로 구르는 이곳에선 그편이 잘 어울리겠지 싶었습니다. 갈 곳을 정하지 않았기에 어디로든 갈 수 있었습니다. 좋은 풍경을 기대하고 갔는데, 좋은 사람들을 만난 여행이었어요. 


첫째 날, 게스트하우스에서는 언어는 달랐지만, 심정이 비슷했던 동갑내기 중국 친구를 만나 고기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사발 나누는 저녁을 함께했습니다.

둘째 날, 시티투어에서는 제주도 귀신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던 돌 문화 공원에서 말은 없지만 사진 포즈 하나는 대담했던 부산 가시나를 만났고요. 어둑해지는 사려니숲길에선 40대 언니 두 분과 수녀님을 만났죠. 하늘이 내려주신 고마운 분들은 렌터카도 태워주시고 숙소에서 재워 주시기도 했어요. 40대 언니 두 분은 동창생이었는데요. 한 분은 독신녀 다른 분은 유부녀였습니다. 그날 밤, 혼자 사는 삶과 결혼하는 삶에 대한 다양한 혜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날은 제주에 태풍이 왔습니다. "15년 만에 온 가을 태풍을 직접 보다니 나는 억수로 운이 좋구나!"하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수녀님과 언니 분들과 헤어진 후, 정류장에서 마주친 제주도에 시집온 지 40년이 훌쩍 지나셨다는 제주 할머니는 서울 처녀를 보니, 그 옛날 서울 살았던 때가 생각난다시며 정 있게 본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들과 딸들의 현재를 자랑하시며, 정말 뿌듯해하시더라고요.

넷째 날은 한라산에 입산금지가 해제됐습니다. 제주에서 꼭 한라산 등반을 해보고 싶었던 터라, 짐을 챙겨 한라산으로 갔습니다. 한라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12시 30분까지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등반을 통제했죠. 제가 한라산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이었는데요. 안내소 언니는 2시간 만에 진달래 대피소 등반은 어려우니, 그 아래 사라오름이나 보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사진기는 접어놓고 맹렬하게 산에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본 어린이 중에 가장 산을 잘 타는 어린이를 만났습니다. 꽤 어른스러운 말투로 저 어른이의 장난을 곧잘 받아칠 줄 아는 어린이였는데요. 아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걸어준 성현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사라오름 어디쯤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며 아쉬워만 하고 말았을 겁니다. 만 12세 성현이는 태풍을 잘 헤치고 온 제게 한라산 신령이 보내준 요정 같은 아이였습니다. 

제가 오른 길은 성판악 코스였는데요. 비가 온 후에 안개가 자작하게 깔려서, 참 멋스러웠습니다. 당시에 단풍이 좀 덜 들었던 것이 아쉬웠는데요. 다음에는 단풍 곱게 물든 날, 볼거리가 많다는 영실 코스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면 하나 먹고 정상을 올랐어요. 꿀맛이었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정상이, 가다 보니 결국 나오더라고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까만 까마귀 떼가 살고 있더라고요. 고집스럽게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기개처럼 까마귀의 모습이 멋스러웠습니다.

한라산 등반을 끝으로, 제주에 온 15년 만의 가을 태풍 여행은 마무리됐습니다. 혼자 가는 여행, 정말 좋았습니다. 가본 데를 또 가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의 미소를 사진기에 담아 집에 왔습니다. 돌아와서 만난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냈습니다. 올레 5코스 큰엉바위에서 사진을 찍었던 관악구에 사는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문자를 보내주셨고, 한라산 정상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던 언니는 동네에서 보자고 연락을 주셨죠. 제주를 떠나왔지만, 제주의 인연은 지금도 쭉~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미소를 보내준 사람들, 사람들의 열린 마음은 그렇게 길이 됐습니다. 그 길만 있다면 나는 어디든 가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여행을 급하게 기약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제주 떠나온 지 한 달,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처방은 또 다른 여행이겠지요. 조만간 또 기차 여행을 가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