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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한잔,생각 한모금

직장인 에세이 '기다림에 대하여'

[직장인으로 살며 생각하며]

‘기다림’에 대한 두 가지 소묘




#1 


개그맨 류담 씨의 어느 인터뷰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힘이 되는 메시지를 전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류담 씨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버티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직장인으로서 매우 공감했더랬습니다. 버.티.기.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 즐겁게 해낸다 해도, 어느 순간 그 일이 자기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일 자체뿐만 아니라, 그 일과 관계된 사람들까지도 얄미운 에너미로 보이기도 하지요. 자신이 수세에 몰린 것 같은 이런 순간이야말로, ‘매너리즘’이 번식하는 최적의 정서적 환경인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가 공수 전환을 이룰 타이밍이기도 하지요. 열성적으로 일하던 스트라이커로서의 속성을 잠시 내려놓고, 뚝심의 디펜더가 되어보는 겁니다.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숱한 ‘공격’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자세, 이것이 ‘버티기’일 것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지피지기의 시간이지요. 이 시간이 끝나면, 적과 나의 구분이 없어질 거라고, 예전에 어느 사회생활 선배는 제게 말했었습니다. 


버팀이라는 태도는 달리 말해 ‘기다림’의 한 종류입니다. 중국의 문호 김용(金庸)이 쓴 대하소설 <신조협려>에는 17년간 헤어졌다가 해후하는 연인(소용녀와 양과)이 등장합니다. 열일곱 해 동안 서로가 서로를 기다린 셈이지요. 강제규 감독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 중에 기구한 이별을 겪어내야만 했던 어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휴전이 선포되고, 오랜 시간이 흘러 백발의 노년이 된 동생은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형의 뼈들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습니다. “왜 이제 왔어요.. 50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라는 오열의 대사와 함께. 사랑하는 대상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보면, 17년을 50년을 기다리게도 되는 것이지요. 기다림 끝에, 잘 버틴 끝에, 마침내 만나게 되는 것. 기다림과 버팀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보상일 겁니다. 


 

<지금은 어쩌면 '기다림'이 필요한 시간 / 출처: Flickr>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일찍이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정의한 바 있는데, 일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그러합니다. 일에 몰입하면 주변 동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고, 덥든 춥든 날씨 따위야 어찌 되었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경 써지지 않는’ 것이지요. 뭔가에 몰입하는 과정은 매우 마력적인 것이어서, 우리의 행위를 어느 순간 능동태에서 수동태로 바꿔놓곤 합니다. 카레이서들이 특히 그런 경험을 드라마틱하게 겪는다고 들었습니다. 초반에는 분명히 ‘drive’였는데, 레이싱이 계속되면서 서서히 ‘driven’의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운전하다(I’m driving)’에서 ‘운전되다(I’m being driven)’의 국면으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뭔가를 사랑하면 이렇게 마법에 빠지는 듯합니다. 능동태에서 수동태로의 국면 전환. 그런데 그 전환에 반드시 필요한 극적 장치가 바로 ‘기다림’과 ‘버팀’의 시간 아닐까요.



#2


몇 해 전 캐나다 밴쿠버에 갔을 때 신비로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은행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전부 일렬로 줄을 서 있었습니다. 줄곧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한국의 은행들처럼 순번대기표를 뽑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냥 줄을 서서 줄이 줄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줄 안에는, 급한 마음에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초조해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냥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줄이 줄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제 눈에 그들은 기다림에 매우 익숙하고, 또한 ‘능숙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은행 일을 보려면 순번대기표를 뽑아야 합니다. 만약 지금 순번이 10번인데 자기 순번대기표가 30번이라면, 은행 소파에 앉아 잡지책을 들여다보거나 근처 가까운 커피숍에 들렀다 올 수도 있지요. 밴쿠버와 한국의 은행 모두 ‘고객을 기다리게 한다’라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사실 어느 은행인들 안 그럴까요.) 하지만 시간을 대하는 방법 면에서는, 두 은행은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국의 은행에서, 고객들은 순번대기표를 뽑음으로써 자기만의 순번을 부여받습니다. 그 순번이 일종의 ‘목표’가 되는 셈이지요. 이를테면, 30번이라는 순번대기표를 뽑아 드는 순간, 자동적으로 현재의 순번을 확인할 테고, 그 순번이 만약 10번이라면, ‘앞으로 20번 더 기다려야겠군’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며, 10번에서 30번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나름 유추해보게 되고, 그 유추를 통해 계산된 시간의 양에 따라 ‘뭘 하며 기다려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여, 그냥 은행 소파에 앉아 잡지책을 들여다보거나 근처 카페에 가거나 집에 갔다가 다시 오거나 하는 프로세스를 거칩니다. 이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 들은 ‘30번’이라는 순번대기표, 즉 목표를 위한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해산되고 소멸됩니다. 그런데 10번에서 30번이 되기까지는 변수가 존재합니다. 10에서 11, 11에서 12, 12에서 13 같은 식으로 순차적이라면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어디 그러하던가요? 11번 고객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10번에서 바로 12번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요컨대, 한국의 은행에서는, 마음 편히 기다리지를 못 합니다. 끊임없이 빨간색 전광판의 ‘띵똥’ 소리와 순번 현황을 확인해야 하니까요. 


이와 비교하면, 캐나다 은행 쪽의 기다림은 훨씬 간편합니다. ‘줄을 선다, 그리고 기다린다’. 내 순번을 예측할 필요도 없고, 전광판을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내 차례가 옵니다. 이게 정말 재미있는 건데, 줄을 선다는 건, 내 차례를 기다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남의 차례를 함께 기다려준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남의 등 뒤에 서서, 그 남의 은행 용무가 끝나기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남의 시간 뒤에 내 시간이 오고, 내 시간 뒤에 남의 시간이 온다’는 명제가 깔려 있습니다. 남의 시간과 내 시간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랄까요. 


 

<꽤 오랜 기다림 끝에 은행 일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노을이 지는 시간. '기다리지' 않았더라면 볼 수 없었던 풍경>
사진 속 장소: 밴쿠버 스탠리 파크(직접 촬영)


‘남’이라는 존재의 유무야말로, 줄 서서 기다리기와 순번대기표 뽑아 기다리기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겁니다. 나만의 순번대기표가 손에 쥐어지는 순간, 남의 번호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건 무척 개인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인 기다림이지요. 이런 기다림이 습관화되면, 어쩔 수 없이 급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가만히 남의 시간을 지켜봐주는 아량을, 캐나다 은행의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부터 배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