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피한잔,생각 한모금

사람의 온기가 따뜻했던, 영주 무섬마을 여행기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루입니다. 대설주의보라고 하네요. 뚱상 사무실 뒤쪽 담벼락에도 흰 눈이 소복하게 쌓였어요. 이런 날은 뜨끈한 온돌방 이불 속에서 군고구마와 귤 한 소쿠리 까먹으면 천국이 따로 없을 텐데 말이죠. 문득, 가을 초입에 다녀온 무섬마을이 떠오릅니다.


‘물 위에 떠있는 섬’ 무섬마을은 동네의 유일한 외나무다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마을입니다. 옛날에는 꽃가마 타고 시집갈 때, 상여로 나갈 때 딱 두 번만 외나무다리를 밟을 수 있었다고 해요. 드라마 <사랑비>와 <추노>의 촬영지이자, 조지훈 시인이 장가 오기도 한 곳. 하지만 이런 유명세보다 사람들의 온기가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곳. 무섬마을에서의 하룻밤은 그 어느 때보다 더없이 따뜻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 무섬마을로 가는 길



서울에서 버스로 약 두 시간 반. 영주 터미널에 내려서 무섬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영주여객’이라는 버스 종점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합니다. 터미널에서 영주여객으로 가는 길에는 중앙시장이라는 작은 시장이 있어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요. ‘여행의 시작은 시장’이라는 지론에 따라, 발걸음을 시장으로 옮겨 봅니다. 

 


중앙시장 한복판에는 늘 사람이 붐비는 분식 포차가 하나 있습니다. 랜OOO라는 신발가게 앞에 있다고 하여, ‘랜떡’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부른다고 하네요. 사진 속에 보이는 사람들은 많은 축에도 못 끼어요. 맛 좀 보고 있자니 어느덧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거든요. 이곳이 유명해진 이유는 떡볶이 1인분이 천 원밖에 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단돈 천 원에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시장을 나옵니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고구마 한 접시


그렇게 버스를 타고 달려 무섬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저녁 6시에 운행하는 막차를 타고 들어왔어요. 도시에서는 아직도 밝을 시각인데, 이곳에서는 온 세상이 컴컴하네요. 무섬마을은 고성 왕곡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 성주 한 개마을, 제주 민속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국가 지정 문화재 7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평균연령 78세, 농토도 없고 벼슬도 하지 않는 아주 조용한 마을이기도 하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던 가을날의 밤. 6시만 돼도 금세 어두워지더라고요.


마을에 들러 미리 예약해둔 숙소로 향했습니다. 급하게 예약하는 통에, 인터넷에서 잘 알려진 곳들은 이미 예약이 다 찼더라고요. “인터넷에는 안 올라온 곳인데,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 있어요. 거기라도 괜찮으면 예약해줄까?”던 마을 아저씨의 제안에 사진도 보지 않고 덜컥 예약한 곳이었어요. 혹시나 길을 못 찾을까 봐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아저씨를 따라 예약해 둔 한옥으로 이동합니다.

   

 


작은 TV가 놓여 있던 방에서는 아흔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아랫목을 뜨끈하게 데우고, 이불을 깔아둔 채로 기다리고 계셨어요. 뜨끈하게 삶은 고구마를 내 오시며, 목 멘다고 생수 한 대접도 갖다 주시네요.


아흔의 할머니는 마치 손녀딸을 만난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가십니다. 영주 시내에 살고 있는 큰딸의 이야기부터 서울에서 출세한 아들, 며느리, 손자의 이야기까지… 단지 이야기를 들기만 했을 뿐인데,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으시다며 커피와 귤과 마른 반찬(?)까지 하나둘씩 내주십니다.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무섬의 아침


다음날, 무섬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밤에는 미처 보지 못 했던 마을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줄지어 있는 한옥들과 감을 말리던 어느 집의 모습, 그리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까지. 북적이는 듯 고요하고, 활발한 듯 차분한 무섬의 아침입니다.

 


이제 마을의 유일한 외나무다리를 건너볼 차례입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외지 사람들은 물에 꼭 한 번은 빠진다고 하니 조심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올해는 날씨가 가물어서 물이 많이 차오르지 않았어요. 다리를 건너는 중간에 몇 번이고 모래가 모습을 드러내네요.

 

날씨가 가물었던 탓에, 물이 많이 차오르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옛날에는 강 건너 농사를 지으러 가기 위해, 소는 물을 가로질러 가고, 사람은 다리를 건너기도 했다네요. 사진 속 모습처럼 말이죠.

 

출처: 무섬마을 홈페이지


짧은 시간이지만 무섬에서 보낸 하루는 참 따뜻했어요. 처음 온 손님을 위해 마을 입구에서부터 먼 길을 동행해주고, 친할머니를 만난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갔던 밤은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 나중에 알고 보니 외나무다리를 흐르는 물이(정식 명칭은 내성천입니다.) 가물었던 이유가 인근에 댐을 건설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하네요. 세상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한반도의 모래톱이 사라질 위기라고 해요. 아무쪼록 잘 보존되어, 몇 년 후 다시 방문했을 때, 다시 한 번 맑고 깊은 물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