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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한잔,생각 한모금

영화 <인투 더 와일드>, 야생에 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정글의 법칙(The law of the Jungle)이라는 말이 있죠. 영국인 소설가 J.R. 키플링의 1894년작 <정글 북(The Jungle Book)>에 나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늑대에게 길러진 주인공 소년 모글리가 깨달은 정글의 법칙이란, 다름 아닌 ‘약육강식’이죠. <정글북>은 동명의 디즈니 애니메이션 탓인지 아동문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우화적 메타포로 가득한 작품이죠. 인간사를 정글에, 인간을 동물들에 빗대어 풀어낸 풍자극입니다. 


<정글북>의 모글리가 정글 속에서 그랬듯, 사회 초년생들은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이른바 사회생활 선배들로부터, ‘정글의 법칙’에 대한 조언을 들으며 시나브로 사회적 동물로 변모해갑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소득 불균형과 양극화가 짙어진 시기에는 더욱 정글의 법칙을 실감하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잠깐,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이곳은 ‘정글’인가요? 


 

▲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2010년 출간된 완역본 <정글북>


여기 야생에 관한 영화가 한 편 있습니다. <인투 더 와일드>(원제 Into the Wild)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정말 (사회생활 선배들의 말대로) 정글이었던가를 반문하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죠. 주인공은 유복한 가정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라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20대 청년입니다. 그의 이름은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에밀 허쉬 분). 이 청년은 도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야생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수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꽃잎을 따 먹는 등 완전한 야생의 삶을 살아가죠. 야생(野生). 들판에서의 삶. 정글과 닮은 듯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공간. 정글의 법칙만으로는 설명되어질 수 없는 야생이라는 세계. 과연 이곳에서 주인공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의 아버지는 NASA에서 근무했던 엘리트입니다. 아들의 졸업 선물로 선뜻 새 차를 사주겠노라 선언할 만큼 물심양면이 풍족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전형적인 엘리트 중년의 이면에는 폭력성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가족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급기야는 아내를 때리기까지 했던 것이죠. 그럼에도 이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트 라이프에 이혼이라는 오점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이죠. 아내 입장에서도 NASA 출신 남편을 곁에 두는 쪽이 거시적으론 이득이라는 판단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정글이니까요. 


부모님의 교육방침대로 크리스토퍼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일종의 전략이었죠. 일단 대학교 졸업 때까지는 군소리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따르고, 이후에 홀연히 떠날 채비를 오랫동안 해왔던 것입니다. 그런 크리스토퍼의 손에는 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같은 자연회귀의 서(書)들이 들려 있었습니다. 야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사전 지침서랄까요. 크리스토퍼의 계획은 순조롭게 실행됩니다. 졸업 선물로 새 차를 사주겠노라는 아버지의 호의를 “내가 원하는 건 자동차 따위가 아니에요”라는 말로 묵살하고, 결국 야생으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rather than love, than money, than faith, than fame, than fairness··· give me truth. 

사랑보다, 돈보다, 신념보다, 명성보다, 공평함보다··· 진실을 달라.

_ 헨리 데이비드 소로 


크리스토퍼는 여행 중 만난 히피 커플에게 소로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자기 삶의 모티브를 표현합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건 언어로 설명되어지지 않을 뿐이죠. 언어로 설명되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이 사회는 비정할 정도로 무심합니다. 그렇게 언어로 설명되는 메이저와 그렇지 못한 마이너리티가 형성되는 것이죠. 크리스토퍼가 도시에서 느꼈던 염증이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짐승들은 울부짖음과 몸짓과 본능으로 소통하지만, 인간은 전적으로 언어에 기대고 있죠. 언어가 사라지면 인간은 무용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리스토퍼는 좀 더 비인간적인, 짐승에 가까운 삶의 태도를 견지한 인물이었던 거죠. 야생에 당도한 그는 산 속에 폐기된 고물 버스를 안식처 삼습니다.

그의 나날은 이제 동물에 가까워집니다. 수렵용 라이플로 짐승을 사냥하고, 주머니칼로 사냥감의 살과 내장을 발라내고, 즉석에서 불을 지펴 구워 먹습니다. 빗물에 몸을 씻고, 바람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기어 다니며 온종일 식물과 곤충들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크리스토퍼가 인간성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야생을 경험함으로써 태초의 인간 본성을 탐구하고 있는 것이랄까요. 매력적인 캠핑족 소녀 트레이시(크리스틴 스튜어트 분)의 유혹에도 그는 스스로를 절제하며 섹스를 거부합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야생에서 깨달은 교훈을 매일 밤 노트에 기록하죠. 인간이 사회화 과정에서 습득한 수많은 것들 중 오로지 이성과 지성만을 크리스토퍼는 남겨둔 것입니다. 


 

▲ 야생마와 야생인, 들판을 질주하다. 온갖 수풀과 늪 같은 장애물로 가득한 정글에선, '질주'란 애초에 불가능하죠.



to measure yourself at least once, to find yourself at least once in the most ancient of human conditions, 

facing the blind, deaf stone alone with nothing to help you but your hands and your own head.

단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측정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 암흑과 고독에 직면해보는 것, 

그 무엇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손과 머리만으로.

_ 영화 속 크리스토퍼의 대사


‘인투 더 와일드’의 삶을 선택한 크리스토퍼의 결말은 죽음이었습니다. 한겨울이 되자 짐승들이 동면에 들어가버린 탓에 그는 사냥감을 찾을 수 없었죠. 그래서 허기를 달래고자 마구 캐 먹었던 들판의 풀들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독초를 삼킨 것이죠. 그렇게 크리스토퍼는 야생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던 고철 버스 안에서 홀로 숨을 거둡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그가 야생에서 살았던 기간은 2년 여. 들에서 태어나 들에서 삶을 마감하는 들짐승다운 죽음이죠. 숨이 멈추는 순간에, 크리스토퍼는 눈을 부릅뜬 채 하늘 위 태양을 들여다봅니다. 그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았죠. 고대의 어느 원시 부족들은 물고기를 지혜로운 존재로 섬겼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진실을 본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야생에서 눈뜬 죽음을 맞은 크리스토퍼는, 어쩌면 인간과 삶과 우주의 진실에 눈을 뜬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정글 밖 야생의 경험은, 인간과 생명과 우주를 들여다보는 눈을 뜨게 해주고


2007년작인 <인투 더 와일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영화 속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는 실제로 우리 세상에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시신은 여행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사망 당시 체중이 30kg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군요. 독초를 먹은 뒤 여러 날 동안 굶주린 끝에 아사한 것입니다. 버스 안는 크리스토퍼가 야생의 삶에 대해 꼼꼼히 적어놓은 노트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노트에 깊은 감명을 받은 한 작가가 크리스토퍼 가족의 동의를 구하여 써낸 이야기가 바로 <인투 더 와일드>이죠. 1996년 출간된 이 책은 2007년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인물이 명배우 숀 펜입니다. 우리에겐 영화 <아이 엠 샘>의 ‘샘’으로 잘 알려진 배우이죠. 영화 <인투 더 와일드>는 평론가와 관객들의 호평을 받으며 수작 반열에 올랐습니다. 


 

▲ 주연배우 에밀 허쉬(왼쪽)와 각본·감독 숀 펜


자, 그럼 서두에 제기했던 질문을 다시 끄집어내보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정말 정글인가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정글의 법칙대로 살아가야 하는 건가요? 대답은 각자의 몫일 테지만, 한 가지 팩트만은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정글은 이 광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 세계에는 사막이 있고, 들판이 있고, 초원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섬이 있고, 설원이 있고, ······.. 정글의 법칙만으로 우리의 우주를 설명할 순 없을 겁니다. 정글의 법칙은, 언어로 설명되어지는 것만을 신봉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지은 마음의 감옥일지도 모르죠. 언어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세계가 정글 바깥에 있습니다. 인투 더 와일드, 인투 더 데저트, 인투 디 오션, 인투 디 아이스필드, ······. 우리의 삶이 정글에만 머물러 있는 삶이 아니기를 바라며, 영화 속 크리스토퍼의 독백으로 글을 맺습니다. 


I don't know much about the sea, but I do know that that's the way it is here.

난 바다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안다.



 

▲ <인투 더 와일드>의 실제 주인공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 야생에서 촬영한 셀프 포트레이트입니다. 

그가 등을 기대고 있는 초록색 철판은 야생의 보금자리였던 고물 버스입니다. 

이 사진의 필름이 저장돼 있던 수동 카메라는 그의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