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걸으니 타인이 보이네
혜화동 대학로 낙산공원 산책
출근 길에는 보통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듣습니다. 지하철 안의 출근 인파 속에 묻혀 있다 보면 가끔 현기증이 날 때가 있는데, 이때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하면 메스꺼움이 어느 정도 사라집니다. 월요일. 지난주 내내 산 꼭대기로 밀어 올렸던 바위 덩어리는 정확히 일주일 만에 다시 굴러 떨어집니다. 월요일 아침에 받아낸 그 무게를 또 한 주 동안 이고 올라야 합니다. 출근 길에 듣는 음악은 그 무게의 실체를 잠시나마 잊게 해줍니다. 이어폰을 꽂은 시지프.
회사에 도착해 이어폰을 귀와 분리시키고, 말아서 가방 속에 보관합니다. 오늘의 높이만큼 바위를 다 굴리면, 퇴근입니다. 가방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이어폰을 꺼냅니다. 엉켜 있습니다. 분명 곱게 말려 있었을 텐데 언제 꼬여버린 것일까. 제멋대로 매듭을 짓고 있는 이어폰 줄을 원래의 직선으로 만들고, 귀에 꽂습니다. 매듭이 풀리지 않은 이어폰으로도 음악을 들을 수는 있습니다. 끊겨 있지 않는 한, 아무리 꼬여 있어도 이어폰 속의 전선은 제 귀로 음악을 흘려 보냅니다. 그렇다 해도 꼬인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건 영 마뜩잖습니다.
계획했던 대로 차근차근 살아온 삶이었는데도, 어느 순간 꼬여버리는 순간이 오곤 합니다. 그럴 때는 모든 매듭을 풀 때 그러하듯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시간을 들인다는 건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늘인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 시간을 길게 늘인다고 상상하면서 단 하루라도 느리게 지내보는 겁니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늘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간의 속도를 줄이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뭐면 어때?'라는 태도로 하루쯤 무책임하게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직장·직업·업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삶 전체에 대한 책임감과 함께 내면의 저음을 듣게 됩니다. 지난한 사회생활, 상심과 외로움만을 안겨준 사랑, 여러 종의 타인들과 맺어야 하는 관계. … 이 모든 괴로움의 합이 소멸하며 나는 다시 0인 상태가 되고, 비로소 無의 행복을 맞습니다. 비록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동안 만끽하는 행복이지만, 이 하루를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반복한다면 정기적으로 행복해지는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mp3 플레이어의 음악을 재생하듯 어느 때고 행복을 꺼낼 수 있는 인간으로 살게 되겠지요.
인생아. 꼬일 테면 꼬여라. 마음껏 엉켜봐라. 멋대로 매듭을 지어버려라.
꼬이고 엉키고 매듭 지어졌어도, 이어폰처럼 여전히 내 안에서는 전류가 흐른다.
이런 마음으로 혜화동 낙산공원에 갔습니다. 오랜만에 오롯이 혼자서 보냈습니다. 혜화동 대학로의 헌책방 '아름다운 가게'에서 책 구경을 하고, 연극계에서 일하는 대학 선배와 우연히 마주치고, 과자를 사 먹고, 낙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는 1,000원짜리 설렁탕 집도 보였는데, 출출하지 않아 들어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대학로부터 낙산공원까지는 줄곧 오르막입니다. 경사도 높은 편이지요. 땀 흘리는 애인의 얼굴을 닦아주는 여자, 아내의 배낭을 대신 짊어진 남편, 기어코 아이를 안고 오르는 엄마, 굽은 허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올려 놓는 할아버지, … 그들 속에 감자칩을 먹으며 걷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혼자 걸으니 타인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보였습니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계단이 접이 식이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올라갈 때는 계단이고, 내려갈 때는 층계들이 모두 펴지면서 평지가 되는 방식.
자전거나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산 정상에서 지상까지 씽- 내려간다면 정말 신날 텐데.
부상자가 속출하려나요…
사적 10호인 한양도성(서울성곽) 위에 앉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1396년 조선시대 때 축성된 것이라는데, 당시 이 돌덩어리들을 날랐던 일꾼들은
600여 년 뒤 카메라를 든 젊은 사람들이 이렇게 앉아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겠지요.
※ 주의: 사적 보호 및 안전 문제 때문에 이제 이 성곽에 올라가 앉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하네요.
역시나 600여 년 전 사람들은 600여 년 뒤 이 성곽 위에서 영화가 촬영될 것이라고 생각 못 했겠지요.
600여 년 된 성곽 위에 앉아 바람을 쐬고 내려오니,
70년 이상을 살아오신 듯한 할아버지께서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리고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 "저 위에 올라가기 힘들지 않아요?"라고 물어오시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 할아버지에게 성곽의 높이는 50년 이상이었을 겁니다.
50년 전 젊은 시절, 건강했던 시절이었다면 쉽게 오를 수 있었을 높이.
성곽 위에 앉아 있던 시간이 갑자기 아득해졌습니다.
젊다는 것, 건강히 살아 있다는 것은 성곽의 돌덩어리만큼 확고한 행복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파트에서 살아온 저로서는 이런 구조의 거주 형태가 낯섭니다.
나의 집과 이웃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집 문을 열면 (복도나 엘리베이터 등을 거치지 않고) 바로 길이 이어지는.
맑은 하늘, 빨랫줄, 빨랫줄에 걸린 빨래.
이 세 가지는 정말 완벽한 조합입니다.
자연과 인위적인 사물이 조화를 이뤄 이토록 사람 마음을 쾌청하게 해주는 게 또 있을까요.
이런 이유로 저는 오래전부터 옥상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어왔습니다.
전신주는 기와집들 한가운데 홀로 서서 전류를 퍼뜨립니다.
그가 쓰러지면 기와지붕 아래 사람들은 빛과 소리를 잃습니다.
대야에 물이 채워져 있는 한, 그 옆의 화초들은 시들지 않을 겁니다.
전신주와 물은 생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돌을 쌓아 올리듯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한 칸씩, 사려 깊고 예쁘게.
그렇게 너와 내가 완성한 사랑이라는 성.
이어폰을 꽂은 시지프에게 하루 동안의 휴식을 허락했던 계단.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에요."라고 말해주는 듯.
알았어, 대답하고 저는 내려갑니다.
.
.
.
올라갔을 때는 내려가야 할 걱정
내려오니 올라갈 수 있다는 기쁨
"언제 또 올라오실 거예요?"
낙산공원의 계단은 오늘 또 이렇게 말해주는 듯.
때로는 나를 위해 혼자 걷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주는 건 어떨까요.
* 카메라 기종: Cannon G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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