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상상 블로그 라이프

인간의 조건 - 부산여행 편

커피한잔,생각 한모금


제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수동적입니다. 이번 여행지가 부산인 이유는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도비의 결혼식 때문입니다. 결혼 날짜를 잡아 놓고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내가 결혼을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겁니다. 즐길 줄 모르는 저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게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서울을 떠나며, 맥주의 잠꼬대


서울을 떠납니다. 떠난다는 설렘에 맥주를 마십니다.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갈망합니다. 이대로 영원히 떠나는 꿈을 자주 꿉니다. 그런데 깨고 나면 내 방 침대 위입니다. 큰 마음 먹고 떠난 여행이 고작 꿈이라니, 서럽습니다. 지금은 딱 꿈을 꾸려는 순간과 같은 기분입니다. 지금 마신 맥주는 꿈의 시작을 알리는 잠꼬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드디어 서울을 떠납니다. 


동행이 있지만 떠나는 그 순간까지 어딜 가보자는 건 없습니다. 그냥 떠납니다. 그래야 여행이 여행답다는 이상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중입니다. 주변엔 검색을 해봐야 한다는 둥 어디가 좋냐는 둥 이것저것 묻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건 주위 깊게 듣지 않는 성격 탓일까요? 소풍 전날의 어린아이처럼 붕 떠있는 마음탓일까요? 잠도 오지 않습니다. 한 시간 뒤엔 상황이 바뀌겠지만요.



ⓒYoongorae


멀뚱멀뚱 한 시간이 흘러 대전에 도착합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무엇을 봤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창밖은 일관되게 푸릅니다. 가끔 깜깜했다가도 다시 푸릅니다. 한겨울에도 여행이라고 하면 마음에 봄이 찾아옵니다. 지금은 계절도 봄이고 마음도 봄입니다. 그래서 봄을 보나 봅니다. 




부산의 밤,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잔


솔직히 밤은 도시의 밤이 더 화려하고 멋집니다. 하늘에서 보아도 그럴 겁니다. 오목조목 빈틈 없이 채워진 간판과 조명이 밤도 낮처럼 느끼게 하지만 조명들은 자기의 역할을 아주 협소한 공간을 밝히는 데 사용합니다. 우리는 조명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조명 하나가 비출 수 있는 공간은 10m가 족히 넘을 겁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1m마다 하나씩 달려있습니다. 꼭 도시에 구겨져 살고 있는 우리 같습니다. 이렇게 살다 보니 우리는 이런 광경을 보면 우와 합니다.



ⓒYoongorae



여행지라 해도 부산은 서울과 같은 도시입니다. 하지만 강이 있는 도시와 바다가 있는 도시는 바라봄의 자세부터 다릅니다. 한강 대교와 광안 대교는 빛깔부터가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파제를 찾아갑니다. 물론 벌써 거하게 취했습니다. 안 취할 방법이 없습니다.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이면 내일을 잊습니다.


영화 '아저씨'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난 오늘만 산다." 

우리는 앞을 내다보길 바랍니다. 남들보다 더 멀리 바라보고 예측하고 예방하려고 애씁니다. 걱정은 내일을 생각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내일을 위한 걱정이 불필요한 걱정이라는 것을. 해도 해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세운 계획은 내일이 되면 물거품이 됩니다. 또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여행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서 좋습니다. 전 오늘 방파제에서 밤을 새우더라도 내일 오후가 되어 일어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런 생각 참 철없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압니다. 굶어 죽기 딱 좋은 각입니다. 여행은 매일이 아니기 때문에 허용되는 생각입니다. 매일이 여행이라면 여행은 더 이상 여행이 아니라 현실인 것이죠. 여행에서만큼은 내일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부산의 낮, 관대함이 만든 여유


여행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듭니다. 몸도 마음도 지갑도. 낮엔 더욱 그렇습니다. '조금 더 걷지 뭐, 조금 더 가보지 뭐, 여기가 아니면 돌아가면 되지'라고 합니다. '이건 꼭 사야지, 비싸지만 먹지 뭐'라고도 합니다. 이런 관대함이 여유를 만듭니다. 회사에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뭐 상상은 할 수 있겠죠. 실천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기만 하면 됩니다. 


관대함이 여유를 분비하여 몸에 스미면 비로소 보입니다. 



ⓒYoongorae

헤엄치는 할머니와 아저씨


부산 감천문화마을에서도 지갑의 관대함을 경험합니다. 현금 오만 원을 가벼운 마음으로 지갑에서 꺼냈습니다. 마음처럼 지갑도 가벼워졌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척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평생 내 몸에 걸칠 수 있는 기념품 하나가 생겼습니다. 이 스카프를 볼 때마다 부산이 떠오를 예정입니다. 어머니한테는 비밀입니다. 아마 결혼을 했다면 마눌님께도 비밀로 했을 겁니다. 삼만 원이라고 속였겠죠. 



ⓒangelica.u


관대함은 전염이 됩니다. 전염이라기보다 부추김입니다. '너도 이거 필요하잖아. 여행 기념품이야. 어서 지갑을 열어 너의 관대함을 보여줘.'라고요. 나만큼 여행이 절실한 사람들은 큰 미끼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 감언이면 덥석 물어버립니다. '잘 어울려요.' 

그런데요, 이번엔 이런 마음으로 나우어의 마음에 낚시질을 한 건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관대함을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감천마을을 떠나고도 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 아침 그는 말했습니다. "그 가방을 사야겠어요." 우린 다시 감천마을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공방을 찾아 가방 값을 지불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관대함은 전염도 아니고 부추김도 아닌가 봅니다. 여행이 주는 위안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angelica.u



부산의 마지막 식사,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건 마지막 밤이고 마지막 날 아침이고 마지막으로 보는 바다이고 마지막으로 먹는 밥입니다. 지금은 바다를 보며 마지막 식사 중입니다. 이런 바다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맞습니다. 돌아가기 싫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식사는 위를 채우는 것 대신에 생각을 채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개구이 한 입에 '아, 집에 가기 싫다.' 또 한 입에 '이런 데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런 식이죠.



ⓒYoongorae


더 아쉬운 건 이렇게 좋은 곳을 발견하는 날은 꼭 마지막 날이라는 겁니다. '여행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어야 했는데 돌아 돌아 이제 왔을까' 또 아쉬워합니다. 결국 체념하고 다음을 기약하게 됩니다. '다음 부산 여행은 더 잘 할 수 있을 거야. 여기부터 와야지.' 


지금까지 몇 번 되지 않는 여행을 곱씹어 보면 클라이맥스는 언제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짐을 싸고 푸는 일도 익숙해졌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걷는 것도 즐거워졌을 마지막이니까요. 여행의 끝을 향해 가는 시계를 볼 때의 기분은 단 하룻밤뿐인 영화 '비포선셋'의 두 주인공에게 아침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 우린 2시간이나 남았다며 여유를 부리기도 하고 1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며 가슴 졸이기도 합니다. 이별은 익숙해지기 힘든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습니다.



ⓒYoongorae



귀가, 집이 주는 위안


애초부터 집에 돌아가는 방법은 생각해 놓지도 않았습니다. 뒤늦게 기차 시간을 검색했습니다. 서울 가는 자리는 만원입니다. 그래서 입석 표를 샀습니다. 그래도 빈자리가 군데군데 보입니다. 처음엔 앉아서, 나중엔 서서 왔습니다. 



ⓒangelica.u


참 이상합니다. 같은 기차인데 떠나올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입니다. 떠날 땐 이동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반면에 집에 돌아가는 길은 길고 지루합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햇볕 쨍한 날이더라도 어둡습니다. 창밖 풍경은 그냥 지나갑니다. 그저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습니다. 순간 이동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귀갓길엔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합니다. 하나는 집이 주는 위안. 다른 하나는 여행을 지속하고 싶은 바람이 아니라 이대로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입니다. 여행은 이미 여행지에서의 마지막 식사로 끝이 났기 때문입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집이 주는 위안이 절실해집니다. 



샤워, 시작과 끝맺음


'샤워'가 하고 싶습니다. 샤워가 무엇이기에. 뜨거운 물에 몸의 때를 씻어내고 싶습니다. 샤워를 '씻는 행위'로만 취급하기엔 뭔가 부족합니다. 밤을 새우고 집에 돌아와 하는 샤워, 땀 흘려 일한 회사에서 돌아와 하는 샤워, 잠이 깨지 않는 아침에 하는 샤워, 그리고 여행지에서 돌아와 하는 샤워는 전후의 행위나 상태를 구분 짓는 역할을 합니다. 


밤새 놀았다면 샤워는 유흥의 때를 벗겨줍니다. 회사에서 돌아왔다면 샤워는 일에 찌든 생각을 벗겨줍니다. 잠이 깨지 않는 아침의 샤워는 침대의 유혹을 벗겨줍니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하는 샤워는 여행의 들뜬 마음과 아쉬움을 벗겨줍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은 샤워 후에 진정으로 완성됩니다. 이제 피곤이 몰려옵니다. 이렇게 잠이 들겠죠. 오늘은 숙면할 예정입니다. 드디어 2박 3일의 부산 여행이 끝났습니다. 



현실, 추억의 연속


이제 현실입니다. 어제는 내일을 어떻게 견딜까 걱정했지만 현실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 또 잘 합니다. 몸에 밴 현실 적응 능력 같은 것이겠죠. 매일 하던 일을 수 년째 반복하고 있으니 이 정도는 껌입니다. 현실에 돌아와도 여행지에 두 번째 애인을 감춰 놓은 것은 아니기에 하루 종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떠나간 옛 애인처럼 문득 떠오릅니다. '어제 이 시간엔 바다를 보며 조개구이를 먹고 있었는데..'하고요.


어찌 되었든 이번 여행은 혼자가 아니라 얻은 것이 있습니다. 혼자일 때처럼 구석구석 부산의 모든 골목을 빨빨 거리며 다니진 못했지만 그들과의 추억이 쌓였습니다. 다시 부산을 가면 그들이 생각날 겁니다. 아, 어제는 현실이었는데 하루 만에 추억이 되었습니다. 



 ⓒYoongorae



 ⓒsamkakdae



이번 부산 여행에는 도비가 끼어 있습니다. 사실 끼어있는 건 여행입니다.  우리 여행의 첫날부터 그녀는 뒷방으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미안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우리보다 더 먼 여행을 갔으니까요. 지금쯤 돌아왔겠죠. 행복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결혼식이 끝났으니까요. 당신 덕분에 추억을 또 하나 쌓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Yoongorae



네가 결혼을 하다니 믿기지 않아.

그래도 다음 주부터는 유부녀라 불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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