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피한잔,생각 한모금

문맹 왕 샤를마뉴는 어떻게 카롤링거 소문자를 만들었을까

   문맹 왕 샤를마뉴는 어떻게 카롤링거 소문자를 만들었을까? 




2011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기억하시죠?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이 1418년 즉위해 집현전 학자들과 1443년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반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세종 역을 맡은 배우 한석규 씨의 열연이 돋보였던 작품이기도 했죠.


엉뚱한 상상이지만, ‘왕이 글자를 만들었다’라는 플롯만 취한다면 유럽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와 비슷한 드라마가 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9세기경 중세 서유럽의 왕이자, 오늘날 알파벳 소문자의 모태가 된 카롤링거 소문자(Carolingian minuscule)를 제정한 샤를마뉴(Charlemagne)입니다. 역사 교과서에는 샤를 대제(大帝)라고도 소개되는 인물이죠.


 

<프랑스 물랭 대성당(Cathedral of Moulins)에 남아 있는 샤를마뉴의 이미지 / 출처 : wikipedia>


현재 우리가 대소문자를 구분하고, 마침표와 쉼표를 찍고, 띄어쓰기를 하는 영문 표기의 기본 원칙은 대부분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소문자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본래 대문자밖에 없었던 알파벳은, 중세 유럽에서 그 모양과 표기법이 지역마다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당시 고문서나 성서를 필사하던 필경사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쉽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나의 표준화된 문자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샤를마뉴가 즉위했을 때, 서유럽의 문자 체계는 5세기경 프랑크 왕국에 의해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의 알파벳을 지역별로 각기 다른 모양과 서체로 표기하거나, 대소문자 구분이 없고, 띄어쓰기나 단락 구분 없이 글을 작성하는 식이었죠. 이런 체계는 카롤링거 왕조 전대인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되어온 것이었으며, 지역 간 의사소통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샤를마뉴가 왕위에 오른 9세기경은 아직 활판인쇄술이 도입되기 전으로 모두가 펜으로 글씨를 썼습니다.(6세기 후인 1455년 독일인 구텐베르크에 의해 유럽의 활판인쇄술은 시작됩니다.) 모든 문서들은 대문자 알파벳으로 작성되었죠. ABCDEFG의 경우처럼 대문자만을 나열했을 경우 글자 간 높낮이가 같아 전체적으로 빽빽하고 답답한 느낌이 강합니다. 낱자 구분도 힘들어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당시 사람들이 서로의 손 글씨를 알아보는 일이 무척 힘들었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띄어쓰기와 구두점 사용도 없었기 때문에 글 읽기는 더욱 불편했죠. 이를 헤아린 샤를마뉴는 학자들에게 해결책을 마련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학자들은 아일랜드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던 하프 언셜(Half Uncial)이라는 서체에 주목했습니다. 이 서체는 지금의 소문자와 유사한 형태인데, 글자 크기가 작고 어센더(ascender)와 디센더(descender)가 나뉘어 있었죠. 대문자에 비해 낱자 구분이 쉽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 어센더: 낱자의 기준선을 중심으로 위로 뻗은 획(ex. 소문자 b, d, h, l 등)

· 디센더: 낱자의 기준선을 중심으로 아래로 뻗은 획(ex. 소문자 p, q 등)


하프 언셜 서체를 참고해 완성된 카롤링거 소문자 역시 어센더와 디센더를 나눴습니다. 여기에 곡선형 획으로 부드러운 외관을 더했죠. 특히 펜글씨에 적합하도록 가능한 한 적은 획으로 쓸 수 있게 고안되었는데, 예를 들면 3획인 대문자 H가 1획인 소문자 h로 변형된 방식입니다.


 

<Irish Half Uncial(왼쪽), Englsh Half Uncial(오른쪽) / 출처: DesignHistory.org>


 

<카롤링거 소문자로 쓰여진 10세기경 고문서 / 출처: wikipedia>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카롤링거 소문자의 제작을 지시한 샤를마뉴가 문맹이었다는 점입니다. 까막눈 임금님이 백성들을 위해 문자 체계를 정비한 일은 퍽 낭만적으로 다가오네요. 문맹이었던 샤를마뉴는, 글자란 최대한 쉬워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이 글을 몰랐으니,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겠죠. 그는 재위 말기인 9세기 초에 수도사들을 비롯한 학자들에게 새로운 서체 개발을 지시했고, 마침내 카롤링거 소문자를 서유럽 전역에 도입함으로써 글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현했습니다.


우선 문단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나머지 내용을 소문자로 작성하게 해 단락을 구분 지었습니다. 지역마다 달랐던 대문자 서체들을 통일했으며, 띄어쓰기 없는 표기법을 폐지하고, 다양한 구두점 사용을 실시했죠. 카롤링거 소문자의 등장으로 문서들은 한결 읽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자연스레 지역들 사이의 문물 교류도 활성화되었죠. 카롤링거 소문자는 12세기경 블랙레터(Black Letter) 서체가 발달할 때까지 전 유럽에 걸쳐 상용될 만큼 유럽인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훗날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은 카롤링거 소문자를 응용한 휴머니스트(Humanist) 서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서체는 활판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활용되었으며, 지금도 국제타이포그래피연맹(ATypI, Association Typographique International)이 채택한 영문 서체 표준 분류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머니스트 서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쓴 형태는 오늘날 이탤릭(Italic) 서체의 근간이 되기도 했죠. 영문을 읽고 쓸 줄 아는 현대인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약 1,200년 전 인물인 샤를마뉴의 영향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아헨 대성당(Aachen Cathedral)에 보존된 샤를마뉴와 후대 왕들의 왕좌 / 출처: wikipedia>


후대 사람들이 으레 대(大) 자를 붙여 기억하는 왕들이 있습니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 만주 벌판을 정벌한 광개토‘대’왕, 그리스·페르시아·인도를 정복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피운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등이 대표적이죠. 이들 모두는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 큰 업적을 달성했거나 넓은 영토를 개척한 왕들입니다. 샤를마뉴도 그중 한 명이죠.


샤를마뉴라는 호칭은 불어 식 이름인 샤를과 ‘위대한’이라는 의미의 불어 형용사 마뉴(magne)를 합친 표현입니다. 라틴어로는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라고 불리는데, 이 역시 샤를의 라틴어 식 이름 카롤루스와 ‘위대한’을 뜻하는 마그누스(Magnus)가 이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큰’ 대접을 받고 있는 샤를마뉴는 중세 유럽 프랑크 왕국의 후반기를 지배한 카롤링거 왕조의 2대 왕입니다. 그는 문맹이었지만 재위 기간인 768년부터 814년까지 로마 고전문화, 그리스도교, 게르만 민족정신을 융합해 이른바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이룩했습니다. 기사도 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영웅 시가들을 수집하는 등 문자를 활용한 문화 부흥에도 큰 관심을 보였죠. 카롤링거 소문자 제정은 당시의 가장 큰 업적들 중 하나로 꼽힙니다.


기록에 따르면 샤를마뉴의 키는 6피트 4인치(약 193cm)였다고 합니다. 타고난 체격과 중세 왕족다운 기사 기질로 온갖 전장을 누비던 용맹한 왕이, 인문학적 감성까지 지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가 말년에는 히브리어 성서를 직접 라틴어로 번역할 만큼 글눈을 밝혔다는 야화도 전해집니다. 역사적인 업적과 더불어 이런저런 풍문도 많은 왕이니, 극화된다면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로 탄생하지 않을까요.